across the universe 

오, 사랑 _루시드 폴

보호글 2006. 2. 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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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가 이미 발표한 적이 있는 논문을 다른 학회지에 싣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인용표시 없이 베끼는 것이
학자로서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이란 판단에는
별 이견이 없다.

물론 이견이 있거나 그냥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몰염치한 짓을 간혹 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일이 들통나 패가망신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보다
인과응보라고 여기는 것이 역시 통념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직결된 추억에 관해서는
그런 암묵적 통념 같은 것이 무조건 적용되진 않는다.
그건 추억이란 것이 학회지에 공개적으로 실린 논문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개인적인 것일 경우가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선물받아 닳도록 들었던 CD,
누군가와 함께 듣고 좋아했던 음악,
누군가와 함께 처음으로 봤던 영화,
함께 갔던 카페에서, 식당에서, 여행지에서
나누었던 대화, 흘러나오던 음악, 걸었던 길들.

그런 건 사실 나와 무관한 세상의 다른 누군가도
똑같이 즐겨 들었고, 같은 곳에서 봤고,
이미 수도 없이 다녀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온갖 음악과 영화와 시간과 장소에
자신과 그 누군가에게만 통하는 의미를 덧씌워
자신만의 추억으로 간직한다.

물론 기억이란 것은 현재 안에서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하고,
무수한 시선들이 통과하면서 왜곡되기도 해서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스르며 고스란히 화석이 되진 않지만,
"그건 네 것이 아니야!"라며 뺏어갈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바로 그 동일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추억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 추억의 일부라고 느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 해도
왈가왈부하고 참견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군가와 공유했다고 생각한,
분명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이
바로 그 누군가에 의해 묵살당하고 도둑맞았다는 생각이 들 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아침에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던, 아직은 덜 북적이던 카페에
금방 닦은 듯 조금은 물기가 어린 타일 바닥의 살짝 미끄러운 느낌,
부산하게 하루를 준비하는 점원들의 "어서오세요."하는 목소리,
버릇처럼 가서 앉던 같은 탁자와 소파 자리.
혹은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때의 서운함. 투덜거림.

포만감 느껴지는 점심 한 끼를 먹고 산책 삼아
한낮의 부산한 거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가서는
어김없이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나왔던
골목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이 음악 좋다, 누구야? 라며 무심히 던진 한 마디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어느 순간 사 들고와
불쑥 내밀었던 어떤 CD.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무한재생해서 듣던 어떤 음악.

백여명, 수백명이 가득 메운 영화관에서도
마치 자신들만 보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 했고,
그 이유 때문에 늘 어떤 감흥이 일어나는 그 영화.

그런 것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스쳐갔고,
똑같이 들어왔고,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보았더라도
그 순간, 그 곳을 함께 했다고 느낀 그 사람들만의 추억이다.
그래서 그 누군가와 함께 했던 추억으로 공명하는
그 장소, 그 영화, 그 음악으로 기억 안에 저장된다.



어떤 대상 그 자체가 아름답고, 독특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대상의 그런 자질에 추억이 덧씌워져
어떤 이에게는 무심한 대상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남다른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그 추억이 "표절"당한 느낌은
누군가의 글귀를 훔치거나
자신의 글을 재탕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 추억을 공유했던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미세한 파장 같은 것에 가깝다.

자신과의 추억이 배어있는 곳을
다른 누군가와 태연히 걸어들어가고,
함께 보았기 때문에 소중했던 영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누군가와 웃으면서 보고,
노래 가사나 노래의 리듬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의미가 담긴 노래를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면,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물론 추억이 담긴 장소를 모두 삶에서 차단해 버릴 순 없다.
오랜 추억이 담긴 노래에도 새로운 의미를 덧입힐 수 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보는 것으로 인해
예전의 그 누군가와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그런 영화가 탄생할 수도 있다.
추억의 재활용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은 그대로 멈춰 있지도,
누군가의 소유물로 화인이 찍히지도 않으니까.
추억에 매달려 삶을 등한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추억이 어린 모든 대상 하나하나에서
추억의 그림자를 모조리 걷어내고 새로운 추억으로
깡그리 도배를 해버리지만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
그것이 무리한 바람인 것일까.

글귀 하나를 생각없이 표절하는 것에도
글쓰는 이로서의 양심을 되돌아보도록 하는 세상에서,
굳이 타인의 시선을 투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진심에 비추어 추억의 표절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고 추억을 나누었던 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역시 지나가 버린 과거가
추억이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들이밀어보는
힘없는 항변에 불과한 것일까.



*****
오늘 어느 친구와의 긴 인터넷 쪽지 대화 끝에
문득 떠오른 생각의 단서를 따라가다가 도착한
터무니없이 길어져버린 생각의 귀착점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까지 온 거야.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