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정적 한가운데서 문득 들려오는 낯선 서걱거림 같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소란 한 번 떨지 않으면서 갑작스레 현기증을 일으키는
그런 영화들이,
가끔
있다.
내게는 "아무도 모른다"가 그랬다.
이 영화가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 실화를 접했을 때는
사실 슬픔이나 연민보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의 이면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걸러지지 않은 인간 내면의 잔인함을 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바탕으로 허구적 재구성을 했다는 이 영화는
경악의 감정이 아니라 미묘한 슬픔과 역설적 희망에
감정의 촉수를 들이댔다.
그런 정서의 차이는 아마도
이미 벌어진 비극적 "결말"을 통해
아이들의 삶과 관계가
서로에게 매달리고, 싫증내고, 버리고 버림받는
과정에 불과했을 것이라 단정지어버린
나의 단선적인 시선과,
세상에게서도, 어머니에게서도 버림 받고도
끝내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보듬어 안고 함께 살아갔고
마지막 작별의 순간까지 떠난 이를 위한 예의를 잊지 않았던
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고 포착하고 되살려낸
감독의 다층적 시각의 차이에서
빚어진 것일 터이다.
하지만 감독은
열세 살 마음에서 일어날 법한
철없음이나 이기심까지도
모조리 눈 감고 지나간 채,
슬픔을 억지로 과장하거나
"아키라"의 삶을 애써 미화하진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삶의 누추함 속에서도
무성한 초록빛 풀들을 가꾸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의 편린으로,
그리고 그 마음이 다치는 안타까운 사건으로
슬픔을 자아낸다.
다른 감정도 물론 그러할 테지만,
슬픔은 참으로 미묘해서
떠나가는 이와의 과장되고 격앙된 포옹 대신
떠난 이와의 지키지 못한 사소한 약속,
함께 살아가며 시간을 들여 눈여겨 본 사람만이 눈치챌 수 있는
떠나간 이의 작은 습관을 기억하며 눈물을 삼킬 때
더 슬프다.
그래서
떠나간 막내동생과 나눈 마지막 기억이
자신이 내뱉은 모진 말과 그 아이에게 던진 텅빈 눈빛,
마지막 잡은 아이의 손이 온기 없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단 사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스산히 손을 떨던 아키라와,
아무 말 없이 곁에서 그 떨리던 손을 잡아주던 친구의
사소한 몸짓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슬픔도
남겨진 이들 앞의 불안한 희망도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버려지고도,
스스로도, 서로도 끝내 저버리지 않는 심지 곧은 마음.
남겨진 아이들은 정말
그 마음으로 세상을 줄곧 바라볼 수 있을까.
버려지더라도,
스스로에게, 세상을 향해 내민 온기 어린 손길을
마지막까지 거두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과연 될 수 있을까.
+++++
형편상 군것질을 자주 하지는 못하는 막내가
오빠가 사다준 초콜렛을 오물오물 먹다가
나중에 먹어야지,라며 아껴 먹던 것.
자신의 생일날 엄마가 꼭 올 거라며
지하철 역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떼를 써서
결국 오빠와 함께 나와 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리며
그 때부터 거의 몇 달동안 아껴 두었던 초콜렛의
마지막 한 알을 탈탈 털어내며,
"어, 마지막이네."하던 장면.
엄마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오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노레일을 본 오빠가 막내에게
"저 모노레일을 타면 하네다 공항에 가.
나중에 꼭 저거 타고 가서 비행기를 구경하자."
라고 약속하던 장면.
결국 막내동생이 죽은 후,
그 때 그 일을 하나도 잊지 않은 오빠가
동생에게 비행기를 보여주고 싶다며 트렁크에 넣어
모노레일을 타고 공항 가던 장면,
그리고 동생이 좋아하던 초콜렛을
한아름 사들고 가던 그 장면에서
끝내 눈물이 나버렸다.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998년작.
이 영화는 사실 내 방짝에게 "아무도 모른다" 디비디가 있어서
그걸 보고 난 후 워낙 좋아했더니,
같은 감독의 작품인데 이것 역시 좋아할 것 같다며
방짝이 추천해줘서 이번 주말에 같이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야...
"아무도 모른다"와 이 영화 두 편으로 나는
공식적으로 이 감독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죽음 앞의 생, 뭐 그런 설정도 꽤나 고전적이지만,
(영화적 설정으로 보면 "죽음 후의 생"이 더 적합하려나.)
기억에 대해 공부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꽤나 즐겨 보는 고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기억과 추억에 관해 친구와 긴 수다를 떨었던
바로 그날 저녁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머리가 참 복잡해졌더랬다.
스포일러의 여지가 다분히 있으므로,
영화를 보시지 않았고,
앞으로 보실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글을 건너 뛰라길 권해 드린다.
이 영화를 보는 게 괜찮은지 저에게 물으신다면,
꼭 한 번 보시라고 강력하게 권해드림.
내 생애 최고의 영화 리스트 5위,
아무리 밀어내도 단연 10위권 안에는 들어갈만한 영화.
아무리 반복되어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는 그런 주제들이 가끔 있다.
("사랑"에 대한 요즘 드라마들의 태도가 그렇긴 한데,
과연 남녀간의 사랑이 정말 그 정도의 무게와 힘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좀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다소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을
그저 낡고 진부한 설정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삶을 사랑하고, 추억을 소중히 하고, 죽음 앞에 숙연해지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뻔한 상투성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빼고 삶에 남는 것은 없으니까.
여기 "원더풀 라이프"(영문제목: Afterlife)에선
레떼의 강을 건너 영원한 망각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는 간이역이 하나 있다.
죽은 이가 일생동안 가장 행복했던 단 하나의 기억을 (사흘 안에) 고르면,
면접관들이 그 기억을 재연해서 영화로 찍어주고
그 영화를 영사실에서 보고 나면, 그 기억 하나만을 간직한 채
저승으로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곳이다.
그 설명을 듣고, "어떤 기억을 선택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나면,
나는 과연 어느 기억을 택할까, 라는 의문이 관객들의 머리에서도
쉽사리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묘한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그건 마치 살아가는 동안 소유의 대상에 대해 그러하듯
기억도 소유물인 양 아까워하며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아" 하고는
무엇 하나 선뜻 버리지 못한 채 욕심을 부리며 저울질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어느 순간 귀결되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고심 끝에, 혹은 아주 수월하게 저마다의 선택을 한다.
관동 대지진 때 대나무 숲에서 밧줄을 메어 만든 그네를 타며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주먹밥을 먹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할머니,
통학길 버스에 앉아 차창 밖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얼굴을 스치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던 아저씨,
구름을 가르며 날아가던 첫 비행의 설레고 낯설던 느낌을 떠올리던 아저씨,
귀를 파줄 때 느끼던 어머니의 포근한 무릎 감촉을 이야기하는 소녀,
아무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며 어쩌다 배실배실 웃음만 짓는
말을 잊은, 소녀같은 할머니...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저 무난하기만 했던 칠십 평생에서
아무런 행복한 기억도 떠올리지 못하고,
어떤 이는 다른 이들이 행복했다고 말한 순간을 제것인양 떠벌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기억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그곳에 들어왔던 두 사자(死者)는
그들의 삶에 미묘한 교차점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은 두 사람 모두 삶을 진지하게 반추하고
능동적으로 기억을 선택할 계기를 제공한다.
약속했던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기억을 선택하지 않거나,
선택하지 못한 이들은
떠나간 이들의 빈 자리를 느끼며
그들을 기억의 한켠에 묻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들처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품은 채.
마치 살아남은 우리들 모두가 그리 하듯.
이 영화의 또다른 매력은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역시 발견했던 매력은)
섬세하고 빈틈없이 서사를 짜면서도
화면에 과장이 없다는 점에 있다.
사후세계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적 상상력을 발휘한
그런 영화들도 좋긴 하겠지만,
이 영화는 아주 평범하게, 어느 폐교 건물을
이승과 저승 사이의 간이역이란 공간으로 설정해
도리어 전자의 것을 기대한 나의 상상을 뒤집어 버렸다.
CG로 괜한 힘을 주지는 대신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이용하며,
상상력의 무게를
시각적 현란함 대신 탄탄한 서사로 승부한
정공법의 이 영화,
과연 멋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 영화는
저승으로 넘어갈 사람들이라는 영화적 설정을 배제하면
마치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지극히 일상적인 인터뷰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처럼 소박하지만,
미학적 균형을 잃지 않고 진지한 주제를 풀어가는 솜씨도 굉장하다.
그리고 마치 핸드 헬드 카메라로 찍은 듯,
능숙치 않은 듯한 솜씨로 조금은 흔들리게 찍은 특정 장면들이,
온갖 CG를 동원해서 만들어낸 완벽한 화면들보다
훨씬 더 정서적으로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느낌을 전달하면서도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는 데서도 잘 부각되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선배, 므사츠키(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_-)의
기억의 중요한 단편을 되살려주고,
그로 인해 그가 자기 곁을 떠나게 될 거란 걸 알았을 때
시오리가 옥상에서 눈을 마구 발로 차고, 눈덩이를 뭉쳐 던지다 바닥에 넘어지는 장면,
그 장면에서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듯하며
그녀의 동작들을 일일이 다 따라가지 않는 듯
몸의 일부만 불균형적으로 잡는 카메라의 시선이
그녀의 불안정한 감정과 포개져서
관객들에게까지 더 와 닿을 것 같았다.
(나에게는 더 와 닿았다.)
(이 점은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역시 그랬는데,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원조교제를 해서
벌어다 준 돈을 빌려주려고 하자, 마음이 상한 아키라가
그녀에게서 돌아서 헐떡헐떡 숨이 차올라 뛰어가던 장면에서
카메라는 때때로 뛰어오는 그 아이보다 앞서 버리기도 해
어설프다 싶은 느낌이 들기조차 했다.
하지만 불균등하게 달음박질치는 사람의 호흡과
바로 그 순간의 아키라의 배신당한 불안한 기분 같은 건
그런 화면이 훨씬 더 정직하게 전달했다.)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경험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
그 단 한 순간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사후 세계에서 지내야 한다고 말한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떤 기억을 선택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