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서점의 추억

a day in the life 2005. 12. 26. 14:48

어떤 이의 블로그에서 "종로서적에 관한 추억"을 읽다가
나도 서점에 관한 추억이 떠올라 몇 자 적어본다.

굳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춘천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
바로 청구서적이라는 서점이다.
물론 지금은 춘천에도 사람들이 만나 어울려 노는 장소가
"나름대로" 확장되긴 했지만,
예전엔 사람들이 약속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밥을 먹고,
이야기하다 헤어지는 유일한 곳이 명동이었다.
그리고 명동에서 만나자고 할 때, "청구 서적 앞에서 만나자"라는 건
사실 굳이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함축돼 있는 것이었다.

물론 혼자 외출해서 누군가를 만날 약속을 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전부터
청구서적은 나에게 각별한 곳이었다.
운동 신경도, 음악적 재능도, 사회화 능력도 발달하지 못했던 내가
어려서부터 유일하게 즐겼던 "놀이"는 책읽기였다.
(아. 과연 소심한 소녀의 우울한 유년기답다 ㅡ.ㅡ; )
물론 나의 부모님은 대한 민국의 많은 부모님이 아마도 그러하듯
책 읽는 것 만큼은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셔서
읽고 싶은 책만큼은 맘껏 읽을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사주셨다.

결국 집에 사놓았던 책을 다 읽고 난 후로부터
아버지는 내가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청구 서적에 데려가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도록 해주셨다.
(그 때는 다 읽지도 않을 책을 산다는 게 넌센스였건만
지금은 사놓은 책을 "전부" 다 읽는다는 게 넌센스로 느껴지는 걸 보면,
지성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지적 허영이 많이 메꾸고 있기도 하다.)

소도시의 2층짜리 작은 서점이 뭐 그리 대단했으랴만,
내 기억 속에 새겨진 그곳은
나로 하여금 내가 자라서 내 집이라는 것이 생기면
"서재"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심어준 그런 곳이었다.
유리문을 밀고 입구에 들어설 때 풍겨오던 먼지 냄새 섞인 종이 냄새는
매캐하다거나 불쾌하다기보다,
아무리 우울했던 기분이라도 금방 풀리게 할만큼 향긋했다.
(그 나이에 내가 우울했던 나날들이 있긴 했을까.
그리고 서점에 간다고 하면 이미 집을 나설 때부터 기분이 들떠 있어서
우울할 틈도 없었을 텐데...)

당시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모두 1층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2층은 내게 더 신비한 곳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일렁이며 스며들던 오후의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내던 빽빽한 책장들.
내가 감히 읽을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온갖 인문, 사회과학 서적들이며, 외국어 서적들,
그리고 아직은 "어린이 세계명작 동화"를 읽던 나에게 한없이 벅차게 느껴졌던
글씨 빽빽히 들어찬 2,300 페이지 짜리 세계 명작 소설들.
그곳에 서서 책을 뒤적이던 "대학생 언니 오빠들" 모습은
아마도 당시 내게 있어 최고의 동경의 대상이었을 듯하다.
그 틈에서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런 책들을 잠시 뒤적여 보노라면
세상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지금은 청구서적이 바로 건너편으로 넓혀 이사를 갔는데,
그 이후 나름 깨끗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바뀌고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대학 들어간 이후로는 서점을 간다 그러면 늘 교보문고였고
(간혹 가다 영풍문고. 난 감정적으로 교보문고가 훨씬 좋다.
어쩌면 거기도 어려서 부모님 따라 서울 갈 때,
꼭 데려 가셨던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은 인터넷 서점이 생겨 서점에 가서
무겁게 책을 사들고 낑낑대며 돌아오는 수고를
굳이 무릅쓸 필요조차 없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 수고로운 서점행이 좋고,
특히 내 어린 시절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청구서적이란 곳은 여전히 각별하다.

책 특유의 냄새가 가득 배어 있고,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책장을 넘기는 소리들이 들리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시간 만에 책을 다 읽어버려도 좋고,
몇 장 뒤적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집에 사들고 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도 좋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내 삶을 지어올리기 시작했던
바로 그곳의 물리적 기억이 어린 서점이라는 곳.

사람의 추억과 감성을 길어올리는 그곳은
아무리 상업적인 의미에서 불필요한 곳이 되더라도
나에게는 결코 불필요한 곳일 수 없을 것 같다.


Posted by papyrus

단물 쓴물

etc. 2005. 12. 21. 16:54
내 친구 하나는 연애의 단물은 남들 차지고,
쓴물은 순 자기 차지인 것 같단 말을 했다.

그 이야기를 보고 처음엔,
단물, 쓴물은 커녕
연애의 찬물이나마 내 차지가 된 게
언젠지 까마득하다 싶었다.

그런데 아니다.
생각해 보니,
연애의 김치국이라도 마셔 본 게
언젠지 모를 지경이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