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손수건 귀퉁이에 수놓인 아기자기한 장식처럼
삶의 미묘한 디테일에 집중한 작고 예쁜 소품들을 좋아한다.
그런 작품에서는 섬섬옥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섬세한 아름다움을
햇볕에 그을린 듯한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손으로
삶을 일구고 길어올리는 진실한 몸짓과는
쉽사리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볼 수 있고, 보아야 하고, 보고 싶은 많은 책이나 영화들 사이에 묻혀
내 기억의 보관함 속에서 먼지가 더깨로 앉은 채
어느 샌가 제목마저 가리워지고 잊혀졌던
조금은 오래된 영화를 참 오랜만에 먼지를 털어 꺼내 봤다.

시골 극장의 까막눈 영사 기사를 연기하든, (시네마 천국)
세계를 울린 민중과 사랑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연기하든
마치 역할이 그에게 맞추어진 듯
수백, 수만 가지 표졍과 몸짓으로 섬세하게 자신의 역할을 표현하는
필립 느와레와
이 영화 촬영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순박하고 진실한 웃음의 시골 우체부 마리오 역의
마시모 트루와시 (Massimo Troisi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다)가
함께 한 "일 포스티노".

우정과 사랑과 삶과 시, 그 어느 하나에도 진심을 다하지 않은 적 없고,
그 어느 하나도 별개로 생각한 적 없는 마리오.
"내 마음이 마치 당신의 언어 위에서 일렁대는 조각배 같았어요.
그래서 듣고 있노라니 배멀미가 나는 것 같았죠"라는 말로
네루다의 바다에 관한 시에 답하여 시인을 놀라게 하고,
온갖 국제 행사 틈바구니에서 짧은 망명기간 동안 함께 했던,
비록 함께 하는 동안 보여준 우정이 거짓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시골 마을의 초라한 우체부에게까지 마음쓰진 못한 네루다에게
조금의 섭섭함은 있었겠지만, 끝까지 우정으로 보답하던 그.

"당신이 떠나면서 우리 섬의 아름다움을 모두 다 가져가 버린 줄 알았는데,
날 위해 남겨둔 것들이 있더군요."라고 하면서
큰 파도, 작은 파도 소리, 벼랑 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
밤하늘의 별빛 (그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
곧 태어날 자신의 아들 파블리토의 심장 소리 등을
네루다에게 보내기 위해 하나하나 테이프에 담으며
실은 그 자신이 시가 되고, 시를 살고 있던 마리오의 모습.

그가 노동자 대회에서 낭송하기로 되어 있던,
네루다에게 바친 그의 시는 끝내 어떤 것이었는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굳이 그 시를 소리내 읽지 않아도
우리는 그의 시를 모두 생생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삶, 그 바깥에 존재한 시는 없었으니까.
그가 친구를 위해 담은 그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별빛의 소리,
그 소리를 담은 그의 마음 이상의 시란 그에게 없었을 테니까.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였는지를
세월의 강을 건너느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래서 완전 무장해제 상태로 있다가
처음엔 그의 수줍은 미소에 함께 웃고,
마지막엔 그의 아련한 미소에 엉뚱하게도 함께 울어버렸다.



"사랑에 빠졌군. 거긴 치료제가 있지." 라던 네루다에게
"치료제요? 싫어요. 전 그냥 이대로 아플래요. 사랑에 빠져 있을래요"
라고 대답하던 마리오처럼
나도 이 감동과 눈물에는 치료제를 쓰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그를 위해 마음 한켠이 아린 채,
그를 위해 조금 울어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Posted by papyrus

하나와 앨리스

review/movie 2005. 12. 29. 11:30

열일곱 살의 세상으로 되돌아간 기분을 맘껏 만끽하게 해주는 사랑스런 영화.
물론 나의 열일곱이 이 소녀들처럼 눈에 띄게 예뻤던 적은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중학교때부터 내내 등하교길을 함께 하던 단짝친구들이 있었다.

초여름이면 온몸을 휘감을 듯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아카시아꽃 흐드러지게 핀
가파른 언덕길을 숨이 턱까지 차올라 함께 걸어 올라갔고,
(바른 맞춤법 표기는 아까시 나무라고 알고 있는데, 참 익숙해지지 않는 어휘다)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았는데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구두 대신 실내화인 흰색 줄무늬 들어간 곤색 슬리퍼를 신고
비를 홀딱 맞으며 40분 꼬박 걸리는 하교길을 희희낙낙 걸어 왔고,
겨울 하교길엔 어김없이, 1000원에 3개 하던 호떡을 2000원어치 사서
셋이서 나눠 먹으며, 매일매일 만나도 그칠 줄 모른는 끝없는 수다로
추위도 잊은 채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 마음을 설레게 한 남자애가
내 이름을 알게 되고, 나를 한 번 쳐다만 봐줘도 좋겠다는
한숨 섞인 수줍은 고백을 처음 서로에게 털어놓기도 했더랬다.

참 오랜만에 바로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돌아가,
여리고 눈물 많은 그 또래 아이들의 순수한 감성과 우정의 미묘한 긴장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영화에 공감하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제 호흡대로 세상을 향해 내딛는 아이들의 더딘 걸음들을
템포를 서둘지 않는 롱테이크로 담았다는 것 역시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대놓고 튀는 극적인 대사 같은 건 없어도, 마치 아귀가 맞는 퍼즐 조각들처럼
영화의 흐름에 따라 제자리를 찾은 듯 꼭 들어맞는 자연스러운 대사도 좋았다.

앨리스 역의 아오이 유우는 장난꾸러기처럼 천진한 표정에서부터
일단 믿는 사람에게는 토달지 않고 절대적 믿음을 주는 사려깊음과
두 살때부터 배웠다는 기품 있는 발레 솜씨로
관객의 마음을 -사실은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는다.
(비 오는 날 검은 쓰레기봉투 같은 비옷을 뒤집어쓰고
무술도 뭐도 아닌 동작을 하며 "스트레스 해소"하고 있던
엉뚱한 행동까지도 다 귀여워 보일 정도로.

나에게도 딸아이가 생긴다면 꼭 한 번쯤 보여주고 싶은 영화.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