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와니와 준하

review/movie 2005. 12. 12. 13:45

"좋다, 니 냄새.
그거 알아?
연인들이 헤어지고 나면
이 체취가 떠오를 때 제일 못 견딘대...
으... 난 또 그 동안 어떻게 참지?"

-준하(주진모), <와니와 준하> 중에서…


*****
너무 솔직해서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겉치레가 없던 까닭에 속되다기보다
담백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던 대사.
감정을 두고 난해한 게임을 할 줄 모르는,
마음에 걸림이 없는 이의 따뜻한 사랑.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것은
기억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관계는-특히 연인들이라면-
온갖 감촉과 향기와 시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너무나 사소하고 미묘한 몸짓이지만
사랑하는 이와 처음으로 손끝이 스치던 순간의
떨리면서도 짜릿한 기억,
늘 귀 기울여 듣고, 때로는 지겹도록 듣기에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사람의 사소한 입버릇
어느 새 서로에게 맞추어진 걸음걸이로 함께 서성댈 때
눈동자 속에 담겨진 익숙한 거리 풍경,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잊지 못해
견디지 못한다는 그 체취.

그건 머리로 애써 되감기를 하려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런 코끝과 손끝, 눈동자 속 기억들이,
그 물리적 공간에 다시 던져졌을 때나
비슷한 습관을 가진 사람을 어디선가 마주치거나
혹은 아무런 맥락도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조차
그 사람을 그 물리적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자기 앞에 불쑥 데려다 놓는다.

시간이 지나고, 온갖 대단했던 사건,
잘잘못을 따지며 서로에게 냈던 상처들,
때로는 심지어 그 이름조차 잊혀질지언정
그 사람을 추억하며 울기도 웃기도 할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람만이 지닌 체취,
그 사람만이 남긴 그 향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김희선에게 있어서도
생애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한
현명한 시나리오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ㅋ)


Posted by papyrus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라니...
아주 상투적이고 진부한 로맨틱 코미디가 바로 연상됐다.
하지만 "네번의 결혼식, 한 번의 장례식"과 "러브 액추얼리"가 그랬던 것처럼
"워킹 타이틀"이라는 영국 프로덕션의 로맨틱 코미디들은
그  뻔함 속에 색다른 향을 덧입히곤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시도는 영화에 잘 어우러지면서도
영화를 돋보이게 하고 차별화한다.

네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을 보면서도 많이 느꼈던 거지만
영국 로맨틱 코미디는 친구들의 존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로맨스의 주인공을 차지하진 않으니
감초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연애를 다룬 많은 영화나 드라마들이 그런 것처럼
친구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이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극 초반에 사랑에 빠지기 전에 잠깐씩 만나는 사람들이거나
중반 이후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의 상담역이나 맡는,
진정한 의미에서 "극의 소품"에 지나지 않는
무수한 다른 주인공의 친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분명 주인공의 캐릭터에 다른 결을 입히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긴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바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인공과 더불어 삶이라는 직물이 되는 존재들이다.

엉뚱하고 터무니 없는 친구들,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대사들,
그런 것도 좋았지만 나에게 두고두고 각인된 장면은
사실 대사 한 마디 없던, 그래서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그런 장면 하나였다.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떠난 후,
벼룩시장이 선 북적북적한 거리를
윌리엄(휴 그랜트)이 헤치고 걸아가다 보니
배경은 그가 내딛는 걸음을 따라 함께 바뀐다.
낙엽 날리던 가을에서 어느 샌가,
눈발 날리며 옷깃 여미게 하는 겨울로,
그리고 온갖 꽃송이들이 만발한 봄날로.

그 때 초반 가을 장면에선 임신해서 배가 불룩했던 한 여인이
마지막 봄 장면에선 순산한 아기를 안고 꽃을 사고.
그리고 초반에 남자와 팔짱끼고 걷던 휴 그랜트의 여동생이
마지막엔 그 남자와 싸우면서 헤어지고.
그렇게 공간의 이동 속에 시간의 흐름까지 포착하는 섬세함을
아주 사소한 데서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여주었다.

물론 이것 역시 이별 후 시간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실제의 삶에 비하면 "가볍게 지나가버리는"
빨리감기의 다른 형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별 후 시간의 흐름을 잠깐의 검은 화면 후
"?? 년 뒤"라는 자막 하나로 훌쩍 건너 뛰어 버리는
"무성의한" 방식에 비한다면,
그녀 없는 거리를 홀로 걷는다는 의미에서
공간적인 빈 자리에만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녀 없이 쓸쓸하게 지나가야 했던 시간적 공백과
그렇게 남겨진 윌리엄의 심리적 공허감까지
여러 결을 덧입혀 표현했던 아름답고도 독특한 장면인 것임엔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장면에 맞춘 듯 들어맞던 "Ain't No Sunshine".
그녀가 떠난 세상엔 햇살조차 비치지 않는다는 그 노래.
글쎄, 돌아온 봄에 다시 햇살이 비치던 걸 보면,
그건 결국 그와 그녀의 재회를 위한 전주곡이었던 것일까.


(사족)
Ain't No Sunshine에 비하면
솔직히 영화의 주제곡이나 다름없던 (아니면 실제로 주제곡이었던가?)
Elvis Costello의 She는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는다.
그 사람 목소리, 솔직히... 좀... 느끼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서.^^;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