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집으로

review/movie 2002. 4. 7. 17:13


기억이나 추억이란 이름의 생각뭉치들은 가끔
사람을 한없이 눅진하게 잡아내리기도 하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누군가가 내 기억 속의 조각난 장면을
일부러 끄집어내 턱-하니 눈 앞에 펴 놓기라도 한 것 같은 무언가를 보면
소스라쳐 놀라고 나선 그 안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 버린다.

"집으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결코 바닥나지 않을 깊이의 포용력을 지닌 (외)할머니와,
반말, 가시돋힌 말,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일곱 살 꼬맹이의 존재,
그들이 던져진 외딴 공간, 그런 것들에 어떤 이들은 어떤 코드를 씌울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코드를 벗어나는 의미망을 펼쳐내는지 그런 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영화에 놀라움이나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그건 너무나 나의 기억과 똑닮아있는 존재들이
버젓이 나와 걸어다닐 때 이런 형상을 하는구나,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영화에 대해 뭔가를 지금 뇌까린다면, 그건,
오늘 아침에 영화를 보고난 직후 미처 생각이라는 것이 내려앉기도 전에,
바로 나타나는 즉각적이고 일차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에서만큼 그렇게까지 심한 오지는 아니더라도
강릉 시내에서 한참을 털털털 버스를 타고 들어가서
흙먼지 풍기는 길을 또 걸어오르고 올라야 닿았던 외갓댁,
그곳에 가면 늘 웃음과 눈물이 섞인 표정으로 계시던, 까맣던 외할머니,
밤이면 개구리, 두꺼비 울음이 가득 메우곤 하던 좁다란 마당,
귀퉁이의 컴컴퀴퀴한 뒷간, 누리끼리한 벽지에 창호지문,
방안과 똑같은 벽지를 바른 미닫이 문달린 작은 창고 가득 할머니 잡동사니,
(그런 창고, 뭔가 부르는 이름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생길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모아둔 과자며 초코파이며 사탕들.
그리고 내가 중고생이 되었을 때도 가끔,
장에 나가 밤을 팔아 사두셨다 엄마 편에보내셨다는 초코파이나
단오장에서 사셨다는 양말 한두 켤레...

말 못하는 채로 쪼그리고 앉아 나물이며 호박을 팔고 있는 할머니가 창피해서
장터의 어느 담장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할머니를 훔쳐 보던 상우의 모습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혹은 보았어도 이미 기억을 헤집어내기조차 어려우리만치
깊이 내려앉아 버린, 기억의 기억 속 어느 귀퉁이에 앉아있는
장터의 외할머니 모습과 겹쳐버린다.

말 한 마디 없이도, 가슴을 둥글게 쓸며 마냥 미안하다는 "말"을 연실하던 할머니 마음을,
독하고쓰라린 "말"로 마구마구 밟아버리던 손자의 모습이 마지막엔
"할머니 많이 아프거든 그냥 아무것도 쓰지 말고 보내.
그럼 상우가,할머니가 보낸 건 줄 알고 곧장 달려올 테니까, 알았지?"라는 말로,
버스 뒤 창가에서 가슴을 둥글게 쓸며 할머니를 마냥 바라보던 모습으로 옮아갈 즈음에 이르러서는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언어의 울타리가
참 감옥같은 것이었을 지도모르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마저 언어가 아니면 한 마디 내뱉을 수 없는 것이 나란 사람이고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조차 고마운 일인지 모르지만.
그렇게나 나의 기억과 닮은, 혹은 닮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사실 내 기억 안에 얼마나 풍요로운 존재가 살아있는가, 싶었다.
한껏 퍼주어도 결코 바닥나지 않는,
아무리 상처입어도 그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지 않는,
애오라지 풍요로움을 능력으로 가지는 존재...

기억은 사람을 눅진하게 끄잡아내리는 관성의 힘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싶다.
도리어 그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이
삶 안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어떤 것들을 해낼수 있는지는,
다만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않을까.

Posted by papyrus
삶은 누구에게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불치의 병에 걸렸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가까이 머물러 있고 그렇지 않은, 죽음의 시점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다가오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너무 냉정하거나 어리석은 탓인지 몰라도 죽음이라는 것에 천착하는 것, 죽음의 공포나 엄습을 경험한 사람들이 유난히 생존 그 자체에 대해 매달리는 것, 혹은 그런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죽음이나 삶의 끝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고 삶에 대해 무절제한 것이 난 잘 이해되지 않는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이 당장 내일 닥쳐오지 않으라는 법도 없고 자기 죽음의 시점을 현재 알고 있다고 해도 정작 그 시점이 되어 봐야 그것이 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죽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구나 공유(?)하는 삶의 한 부분일 뿐인 죽음이 그것을 지나치게 절실히 자각한 사람이나 전혀 자각하지 못한 사람에게나 종종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 대해 난 아마도 좀 냉소적인 편인 듯하다.

"자살관광버스"라는 우리말 제목의 영화 일어 원제는 "살아요!"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단정적으로 말하고 보니 그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다만 글자 모양을 보아하나 영화 중간에 미쯔끼가 종이학에 적어 사람들에게 돌린 글귀 "살아요!"와 일치하는 듯했다.^^) 모두들 이런저런 각자의 사연으로 인해, 결코 갚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빚을 진 사람들이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절벽에서 관광버스의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죽은 후, 자기 죽음을 통해 받게 될 보험금으로 빚을 갚아보겠다고 모이게 된다. 모두들 자살 관광 패키지를 운영하는 아라가끼씨에게 설득을 당해 자신의 무력함, 삶의 무용함을 절실히 깨닫고서. 1997년 12월 30일 오전쯤, 바로 며칠 전 정신병원에 입원해 동참하지 못하게 된 ???씨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예정대로 모인 열한 명과 아라가끼씨가 출발하려는 찰나에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아가씨 미쯔끼가 예기치 않게 나타난다. 삼촌 ???씨가 산 표를 대신 받아들고 아마도 새해를 시작하기 전에 추억이나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관광에 나섰을 법한 미쯔끼를 앞에 두고 아라가끼씨는 잠시 갈등한다. 자살을 위한 욕구라고는 전혀 없음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그녀를 그대로 태워갈 것인가, 어떻게든 거절할 것인가. 하지만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는 선심쓰듯 그녀를 태운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에 나머지 승객들에게 사태를 설명하는 그는 냉정히 말한다. 그녀가 그 차에 타게 된 것도, 그래서 결국 그들과 함께 다음날 죽는 것도 그녀의 운명일 뿐이라고...

영화의 초반에, 죽음을 통해 받게 될 보상금의 액수와 그것을 통해 빚을 갚고도 남을 차액을 말해 주면서 몇몇의 자살을 설득하는 아라가끼씨와의 대화를 통해 버스 승객들이 어떤 사연으로 버스에 오르게 되었는지가 대강 나온다. 그리고 D-Day 전날 사우나탕에 둘러 앉아서, 여행 도중 군데군데서 서로가 몇 장짜리 사람인지를 묻고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어렴풋이 그들 각자의 자살동기(?)가 밝혀지긴 하지만 그런 것들을 자세히 파고들거나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장면의 중간중간 끼어드는 미쯔끼의 평범함, 관광버스 안에서 끝말잇기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거나 혼자 심심할 때면 색색의 종이학을 접고 있거나, 요약해보면 "인생은 아름다워"랄 수 있는 류의 동일한 노래만 반복해서 부르는 그녀의 살아있음은 차라리 괴상한 돌출행동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신이 자살관광버스를 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고 부당한 운명을 피하려고 몸부림치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의 기획자인 아라가끼씨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그녀의 생존욕은 분명 자연스러운 것일진대 도리어 선동영화류의 감정만 앞선 구호나 신파조의 처량한 대사처럼만 들릴 뿐이다.

부당한 운명에 항변하는 그녀의 말들은 무엇 하나 틀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 나의 무신경함, 무심함, 무자비함 때문일 터이지만, 일부분 그녀의 말에서 배어나는 삶에 대한 상투적 찬사에 대한 일말의 불편함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단지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연장하는 것 자체가, 생존 그 자체가 의미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라 느꼈다. 결국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던 지점에서, 또 하나의 자살예정자였던 운전기사가, 버스를 급정차시키고, 삶에 천착하는 그들을 냉소하며 내려버린 아라가끼씨만 놔둔 채 출발할 때, 그들이 죽음을 피했구나, 안도하며 영화는 끝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영화는 심란하게도 그들을 태운 버스가 트럭과 충돌하여 전원 사망했다는 뉴스와 아라가끼씨의 기묘한 미소로 매듭짓는다.

그 심란함, 미진하고 명쾌하지 않은 느낌 때문인지 이 영화는 삶을 사랑하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뜻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보다 잘 이해할 수 없게 중간중간 교차편집된 깡통차기 놀이(?)의 장면과 결말의 예측불허성, 그리고 미쯔끼의 입을 통해 영화초반에 소개된 끝말잇기 놀이가, 후반부에 발작을 일으킨 야시노씨를 깨우기 위해 모두가 필사적으로 참가하는 것에서, 혼자 남은 아라가끼씨가 절벽 어귀에서 스스로에게 되뇌듯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연쇄가 독특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어떤 심오한 의도가 있기나 한 것인지, 그냥 장난이나 치려는 것에 속아넘어가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장면들을 통해서 이 영화만의 독특한 의미를 길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영화 제목이기도 한, "살아요"라는 미쯔끼의 글귀가 아라가끼씨를 내려놓고 떠나면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채 되살아나기도 전에 그들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아마도 삶이란 것이 워낙 그런 것인 탓이 아닐까 싶다. 죽음이 선고되지 않았다고, 죽음을 스스로 결심하지 않았다고, 죽음으로부터 자의적으로 거리를 좁히거나 넓혔다고 해서 죽음은 저절로 멀찍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린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불쑥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우리에게 잠시 시간을 더 내줄 수도 있는, 그저 그대로 삶의 한 부분일 뿐인 것. 그렇다고 "오버해서" 절망하거나 비관할 것도, 광분할 것도 아닌, 덤덤히 받아들일 미지의 것. 아귀가 딱 들어맞진 않겠지만 아라가끼씨가 영화 중간 컷에서 몇몇에게 차보라는 듯 밟고 서 있었고, 마지막에 미쯔끼가 공터에서 힘껏 차낸 그 깡통이란 유통기한이 있는 삶,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힘껏 차서 걷어내 본들 찍혀있는, 혹은 찍어두진 않더라도 어차피 정해져 있는 유통기한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

결국 이 영화의 설정을 처음 귀동냥해서 알게 됐을 때 머리 속에 맴돌던 생각을, 썩 어울린다고 생각진 않지만, 아무튼 이 쪽글의 제목으로 달아버렸다. 자살을 결심하고 가는 사람들과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버스에 오른 한 사람. 죽음의 시점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언제 올지 알지도 못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당겨 생각지 않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 한 사람. 그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과정을 거쳐가는 것, 살아가는 것이지만, 그 과정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 아닌지. 각자 다른 생각으로 같은 삶이라는 작은 버스를 탄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동시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관광버스란 어쩌면 그렇게 삶에 대한 은유이거나, 혹은 직설 어법일 수도 있는 것. 그래서 결국 심하게 말해, 살아가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기도 한 것. 하지만 누구나 겪어야 할 그 과정이 온다는 것이 그 자체로 절망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라가끼씨 말처럼 내일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을 즐길 수 있는 것인지, 미쯔끼처럼 내일이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무렴 어떠랴. 언젠가는 사라질 테지만, 지금은 여기 있을 뿐인 걸.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