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늑대의 후예들

review/movie 2002. 1. 15. 15:53

공포의 실체는 인간 아닌
그 어떤 것에도 깃들여 있지 않다.

프랑스의 어느 마을 제보당에
늑대로 추정되는 야수의 습격을 받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곳에 파견되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프롱삭과 마니는
단순한 늑대의 짓이라 치부하거나,
아예 자신들이 본 적조차 없는 환상의 동물들을 거론하며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 마을의 상류층 사람들을 접한다.
그리고 사건을 대충 무마해서 왕의 심기를 편케 하려는
파리 궁정 사람들의 압력까지 가세한다.

괴기 소설 혹은 Gothic novel 이라고 주로 분류되는 서사의 장르는
일상이나 삶을 옭죄어 들어오는 미지의 공포,
그것의 실체를 밝혀내는 과정, 혹은 그것의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주된 이야기의 구조로 삼는다고 알고 있다.
결국 그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의 영역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상,
인간 자신이나 인간이 길들이고 지배할 수 있는 익숙한 생명체가
바로 그 공포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나면
그 결과만으로도 아마 인간은 충분한 위안과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 영화에서도 결국 사건의 배후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동물,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야생의 동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어떤 야생동물을 숨겨서 키우는 청년을
왕권에 대항하는 그 지방 신부가 교회의 세력 안으로 포섭해서는
그 동물을 풀어서 공포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야수가 왕을 벌할 것이라고,
왕의 부덕함이 야수의 광포함을 낳고 있다며
사람들에게 공포심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을 끝까지 추적했던 프롱삭 기사는 친구 마니마저 잃어가며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고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프리카로 떠난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는 것,
신앙에 사로잡힌 한 신부의 광기가 그 모든 일을 초래했다는
결말에 대해 별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공포의 실체를 밝혀냈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나 세계의 일이 아닌
"우리 인간"이 이해가능한 영역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편안함을 줄 수야 있겠는가.
차라리 인간의 믿음, 인간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
사랑과 은총대신 어리는
분노와 적개심이라는 것이
인간 자신마저 황폐하게 만드는
스스로를 향한 저주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잔인한 과정이 있을 뿐.
Posted by papyrus

살아 숨쉬는 공간

etc. 2001. 5. 15. 02:10
식영정, 면앙정이니, 소쇄원을 돌아보며 유난히 좋았던 건
그곳이 여전히 사람이 올라가 앉을 수도 드러누울 수도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보호와 관리의 대상, 박물관과 같은 관람과 조망의 공간에 머무를 뿐인
다른 많은 고건물들에 비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그 점이 바로 그곳을 살아있게 한는 거 같았달까.

석불사(석굴암) 돌부처를 개방해 놓았더니 사람들이 아들 낳기를 비는 마음으로
오른쪽 무릎인가 하여튼 어딘가를 자꾸 쓰다듬어 닳기에
밧줄을 둘러치는 것도 모자라 유리 안에 가두어 버린 것,
보전을 위해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팔만대장경.
물론 사람들이 무절제하게 만져보고 쓰다듬었다는 거야 닳아진 흔적이 있으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보았다고 그렇게까지 신기하게 여겨 그걸 이른 바, 훼손시킬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이미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숨쉬고 있는 공간도, 대상도 아니라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의 우리에게야 범접할 수 없는 선조의 고귀하고 고결한 문화유산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들 이전의 부처상이 그러했고 불교 경전이 그러했듯이,
그때의 지금에 생각하는 부처의 모습이 투영된 하나의 조각상일 따름인 것이 석굴암의 부처고
자신들이 믿는 세계를 자기 언어로 담아낸 글이 팔만대장경일 뿐이었던 것 아닌가...

답사지의 한 군데였던 광한루만 해도 워낙 잘 알려져 있다 보니
시설물 "보호"를 위해 올라갈 수 없게 해 놓았다.
뜨거운 햇살과 흙먼지 날려 흩어지는 그곳이
식영정이나 면앙정보다 조금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조차 않는데도 말이다.
하긴 소쇄원은 개방시간이 지나서 간 바람에 들어가 보지 못하긴 했지만
그나마 문턱의 대봉대에라도 앉아 숨돌릴 수 있었는데.
너무 극단적인 말인지 몰라도 솔직히 난
그 건물들 우리가 억지로 보호하고 보전하고 복원해주려 애쓸 필요없는 듯했다.
그것들만이 영원불멸해야만 하는 무슨 절대적 이유 따위는 없는 듯...
그냥 사람들이 언제나 자연스럽게 드나들며 쉬어가고 살아갈 수 있게 하면
그 숨결이 배어 사람과 함께 살만큼 살다 함께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삶과 능동적 관계를 맺을 때 공간도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미 죽은 공간인데
그곳에 살지도 않으면서 그곳의 목숨만 간신히 연명시키기 위해
이른 바 관리를 하는 사람에게도 그 억지스러운 관계는 고통일 뿐이고,
삶을 끌어안지 못하는 그 공간에게도 고통일 따름인 거 아닌지.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생존 당시 그 극단의 전용 극장인 "글로브"를 그대로 재현해서 복원되어 있다.
그곳은 목적자체가 그래서 복원되었겠지만 재건립 이후 계속 실제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단지 셰익스피어라는 신화화된 인물을 한층 더 초월적 존재로 격상시키기 위한 복원이 아니라
그를 삶 안에 끌어들이고 그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든 삶의 원리를 직접 능동적으로 살아냄으로써
지금 여기의 삶의 원리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한 것이 그 공연장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과거의 공간이 그렇게 현재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