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Sliding Doors

review/movie 2003. 9. 27. 23:28

티비 유선방송에서 나오길래
이미 너덧 번은 족히 보았을 법한 이 영화를
어색한 성우의 더빙 목소리까지 감수해가며
또다시 끝까지 한 번 다 보았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감성이 있고 좋아하는 영화도 제각각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나름, 그런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나마 잘 나가다가 맥빠지는 결말이었다고 하는 평은
오히려 양호한 편이고
이 영화를 쳐다도 보기 싫어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교차편집되면서 엇갈리는 두 개의 스토리라인이
헷갈리고 정신없다가 어느 순간에 너무 지루해진다고까지 한다.

이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봤던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내가,
인생을 지배하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지 않아도
삶의 소소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포착해내는 영화들을
좀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이 영화도 지루한 줄 모르고
푹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내세울만한 거창한 필모그래피라고는 거의 없는 배우지만
특히 남자배우 존 한나(John Hannah)의 따뜻하고 재치있는 유머가 좋았고
귀네스 펠트로가 염색한 금발의 짧은 머리로 나올 때 스타일들 모두 멋졌다^^
작은 관심으로 시작된 호감이 미묘한 감정의 교류들, 사소한 스침들을 통해 발전하면서
연애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과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였다.

두 개의 이야기들이 엇갈리는 것이 절묘하지만
잘 설명이 안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이 사실 맞긴 맞을지도 모른다.
과연 제임스와 사랑을 했던 헬렌의 생활이
마지막에 가서야 제리와 헤어지는 또 다른 헬렌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그녀의 꿈 같은 것이라고 하는지
엄밀히 무엇을 시사하려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도
나에게 있어서 이 영화의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았다.

우유분단의 극치에 게으름뱅이인 남자친구가
자신을 끝까지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처절한 절망의 시점에서
다시 우연처럼 제임스를 만나게 되는, 일말의 희망이나
겨우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와의 오해가 풀려 절대 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행복을 향해
발을 내딛게 되는 것 같은 희망의 시점에서
죽음을 맞기도 하는 엇갈린 운명들은
사소한 선택의 차이들로 빚어지는 일상의 현실적 면모를,
그 자체로 삶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Posted by papyrus

싱글즈

review/movie 2003. 8. 21. 21:53
스물 아홉.
아슬아슬한 나이.

아마도 세상이 여성의 삶에
사회적 나이를 매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아슬아슬한 서른 즈음은,
여자들에게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별일 없이 무던히 지나가버려
당사자를 황당하게 하는,
그런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다.
스물아홉이 되기 전엔
좀 그럴 듯한 커리어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웬만큼 돈도 모아 놓았어야 할 것 같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도 해야 할 것 같고,
조금 빠르다면 똘똘한 아이 하나 낳아서
유복한 가정에서 평탄하게 키워나가야 할 것도 같고.

싱글즈는 그런 당연한 환상들이 깨어진
현실의 어느 언저리로부터 시작한다.
있던 남친한테도 차이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서 좌천당하고,
얼빵한 분위기의 남자가 눈치없이 얼쩡대고,
같잖은 옛날 직장상사가 성희롱을 하고.
하지만 그렇게 환상이 산산조각난 그 언저리에서,
얼빵한 줄만 알았던 남자가 사실은
이해심 많고, 생길만큼 생겨준 백마탄 왕자님으로 돌변하며
다시 환상은 충실히 이행되기 시작하는 듯하다.

하지만 스물 아홉의 "철없는" 이 싱글은
그 환상을 여지없이 걷어차 버린다.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는,
그들의 죽마고우의 아이를 임신해버리고도
그 죽마고우에게 입 꾹 다물고
미혼녀가 될 "애먼"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녀 역시도 생뚱맞게 그 친구의 남편(?),
아이의 아빠가 되어주기로 한다.

이 영화를 본 어떤 분은,
서른즈음의 감성이 요구하는 온갖 말장난으로 가득찬,
그래서 그냥
생각없이 한바탕 웃어버리고 나와버리면 그 뿐인
허탈한 영화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하더라.

그러나 내가 이미 꺾어진 오십도 넘어
그 서른 즈음으로 근접해가는 탓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 비친 그 영화의 현실들은 그렇게 녹녹치만은 않았다.
그녀들의 선택은
호탕한 웃음 속에 무심결에 묻혀 버렸는지 모르지만,
사회가 그 또래의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표준들을 과감히 거부하고
그 규범의 바깥에서 생각한 것을 행동에 옮기는
그런 용감한 결단으로 보였다.

물론 기성세대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젊은 애들의 허랑하고, 어리석고, 치기어린 무모함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남자와의 결혼을 뿌리친-어쩌면 좀 유보한- 나난이나
임신을 계기로 결국 안정되고, 표준적인 가정에 안주할 수도 있었던 것을 거부한 동미나
그들의 선택이 어리석어 보이는 그 무게만큼
그 또래의 우리들에게 부과된 일상적 평범함, 억압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반증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녀들의 선택은
여성을 향한 사회적 억압에 대한 경쾌한 도전인 것이 아닐까.


헌데 이 영화, "싱글즈"인데도 싱글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