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하러 오시게"
처마엔 빗물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엔 가느다랗게 향기 풍기는데, 지금 친구 두엇과 함께 소매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 앉아서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우한 생각들을 씻고 있네.
이런 때 우리 여인汝仁(허균의 지우 李再榮의 자)이 없어서는 안될 테지. 자네 집 사자 같은 늙은 아내가 반드시 고함을 지르면서 자네 얼굴을 고양이 면상으로 만들 테지만, 늙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움츠려 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종놈에게 우산을 가지고 대기하도록 해 놓았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으리. 빨리 빨리 오시게나. 모이고 흩어짐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겠는가. <卷21>
- 허균 산문집, 『누추한 내 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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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자발성의 발로로 손에 잡아 읽기 시작한 책이다.
한동안 모든 독서는 그저 수업과 과제를 위한 통과의례로써
해내는 작업이었는데, 김풍기 선생님으로부터
역자 사인까지 가장 먼저 받고 기쁜 나머지
바로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김풍기 선생님께서 서문에도 밝혀두었지만
허균을 생각하면 어째 좀 과격하고 과단성 있는 혁명가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데,
짤막짤막한 편지글이나 독후감, 수필 같은
이 일상의 기록들에서 발견되는 그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때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도 하는,
감추어진 면모들을 발견하게 하는 글이다.
<허균전집>을 저본으로 하여 발췌한 글을
번역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 <누추한 내 방>은
그렇게 허균의 짤막한 일상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을 해야한다는
지나친 부담을 가지고 읽을 필요도 없고
때에 따라서는 마음에 드는 곳을 불쑥 펴서
그 부분을 먼저 읽어도 무방한,
가벼운 독서를 위해서까지 열려있는 책이면서도
진지한 고민과 마음 따뜻한 감동을 수반하여
한편으로는 심원한 깊이를 가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능한 허균에 관한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낯선 친구로부터 온 신비한 편지,
타임캡슐 속에 숨겨져 있던 미지의 인물에 대한 은밀한 기록처럼
읽어내려 간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 원문도 함께 실려있지만
한문이 익숙치 않아 그런 건 참고할 수 없더라도
김풍기 선생님의 유려한 번역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절 허균의 우정과 가족애, 일상의 고민들을
친숙한 시선으로 엿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여기 인용해 놓은,
친구에게 술 한잔 청하는 이 짧은 메모 속에서
그의 삶에서 배어나는 여유와 풍취를 느낀다.
그리고 수 백년전에 치열하게 살아갔던 지식인에게서도
친구를 술자리에 청할 때는
어서 오라고 장난스레 칭얼대는 듯, 약간은 농하는 듯,하며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친숙한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친구의 유혹 앞에 약하기는 그렇게 누구나 매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