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누추한 내 방

review/book 2003. 10. 20. 16:21

"술 한잔 하러 오시게"

처마엔 빗물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엔 가느다랗게 향기 풍기는데, 지금 친구 두엇과 함께 소매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 앉아서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우한 생각들을 씻고 있네.

이런 때 우리 여인汝仁(허균의 지우 李再榮의 자)이 없어서는 안될 테지. 자네 집 사자 같은 늙은 아내가 반드시 고함을 지르면서 자네 얼굴을 고양이 면상으로 만들 테지만, 늙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움츠려 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종놈에게 우산을 가지고 대기하도록 해 놓았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으리. 빨리 빨리 오시게나. 모이고 흩어짐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겠는가. <卷21>

- 허균 산문집, 『누추한 내 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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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자발성의 발로로 손에 잡아 읽기 시작한 책이다.
한동안 모든 독서는 그저 수업과 과제를 위한 통과의례로써
해내는 작업이었는데, 김풍기 선생님으로부터
역자 사인까지 가장 먼저 받고 기쁜 나머지
바로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김풍기 선생님께서 서문에도 밝혀두었지만
허균을 생각하면 어째 좀 과격하고 과단성 있는 혁명가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데,
짤막짤막한 편지글이나 독후감, 수필 같은
이 일상의 기록들에서 발견되는 그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때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도 하는,
감추어진 면모들을 발견하게 하는 글이다.

<허균전집>을 저본으로 하여 발췌한 글을
번역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 <누추한 내 방>은
그렇게 허균의 짤막한 일상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을 해야한다는
지나친 부담을 가지고 읽을 필요도 없고
때에 따라서는 마음에 드는 곳을 불쑥 펴서
그 부분을 먼저 읽어도 무방한,
가벼운 독서를 위해서까지 열려있는 책이면서도
진지한 고민과 마음 따뜻한 감동을 수반하여
한편으로는 심원한 깊이를 가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능한 허균에 관한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낯선 친구로부터 온 신비한 편지,
타임캡슐 속에 숨겨져 있던 미지의 인물에 대한 은밀한 기록처럼
읽어내려 간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 원문도 함께 실려있지만
한문이 익숙치 않아 그런 건 참고할 수 없더라도
김풍기 선생님의 유려한 번역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절 허균의 우정과 가족애, 일상의 고민들을
친숙한 시선으로 엿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여기 인용해 놓은,
친구에게 술 한잔 청하는 이 짧은 메모 속에서
그의 삶에서 배어나는 여유와 풍취를 느낀다.
그리고 수 백년전에 치열하게 살아갔던 지식인에게서도
친구를 술자리에 청할 때는
어서 오라고 장난스레 칭얼대는 듯, 약간은 농하는 듯,하며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친숙한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친구의 유혹 앞에 약하기는 그렇게 누구나 매일반^^;;
Posted by papyrus

첫사랑

review/drama 2003. 9. 29. 12:28

그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이런 느낌에 나는 가끔 진저리를 쳤다.
너무나 완강할 정도로 변하지 않는 그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묻던 유지태의 질문에
마치 뿌리를 박기라도 한 삶들처럼
고은님의 글, 그녀의 작품에서는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준희(신성우)는 오랜 첫사랑인 은영 선배를 잊고
희수(조안)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찾고 배웠으며,
서경(김지수)도 10년을 한결같이 바라보아 온 첫사랑을 접고
새로운 사랑에 몸을 맡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작품에 서린 완강한 사랑들에
가끔은 몸부림을 치게 된다.
물론 그렇게 변함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느끼는
그 신비한 사랑의 힘이
번지점프를 하다,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다른 몸을 빌어 태어나
다른 사랑을 시작한 태희에게서
인우는 고통스럽게 그의 기억과 그녀의 과거를 헤집어
오래된 사랑의 기억 안에 서로를 묻어버린다.
(최소한 그것이 나의 인상이었다.)

꼬맹이때부터 함께 자라나서
서로 거의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부가 되어버린 희수에게서
영우(조현재)는 헤어져 있은 지 4년이 되어서도 사랑을 지우지 못한다.
물론 영우는 희수의 사랑을 충분히 존중했고
그녀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이준희 선생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 이상으로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첫사랑이란 먼저 그 사람을 알고
사랑하기 시작한 순서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많은 인물들이 작품 안에서 되뇌고 있지만
여전히 인물들은 한 사람만을 해바라기하는 완강한 기억을
훌훌 털어버리지는 못한다.
희수에게 선생님이 남겨준 딸 희주를 향한 사랑 이외의
다른 사랑은 오지 않을 거라는 것,
영우에게 희수 이외의 다른 사랑을 어쩌면 없을 거라는 것,
그런 건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그들에게 그 사랑은
첫사랑이기 때문에 마지막 사랑이어야 하는 건 아니더라도
그 사랑만이 온전한 사랑, 모든 것을 태운 사랑이고
다른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을 했던 기억은 새로운 사랑을 위한 따뜻한 자양분이기보다
언제나 가슴 한켠을 시리고 아프게만 하는,
그래서 사람을 뒷걸음질치게 하는
관성과 중력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사랑했던 사람들, 함께 호흡하고 웃고 떠들었던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새삶을 시작한다는 건
때로는 말도 안되는 요구다.
그들의 그림자, 존재감은 언제나 삶 안에 드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무언가 아프고 시린 것으로만 남아야 하는지...
그들을 사랑했던 따뜻한 기억,
그들이 존재했던 자리의 온기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첫사랑처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싶은 사랑이 또 올 거라고,
은지(옥지영)는 영우에게 말했지만,
영우에게 그 사랑은 은지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그녀조차 그 말을 했을 때,
자신의 첫사랑인 영우가
자신에게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말이지,
자신에게 다른 사랑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닐 것 같다.

영우는 다시 시작할 수도, 그것이 끝일 수도 있는 원점에 돌아와
과연 무엇을 끝내고 무엇을 시작하게 될까 궁금하다.
나에게는 왜 그것이 새로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옛사랑의 그림자 곁만을 맴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만 보이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