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왠지

to a t 2004. 1. 14. 02:25

이건 늘 헷갈려서 예전에 사전을 찾아보고
확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전에서 찾은 내용을
내 멋대로 왜곡시켜 기억했던 모양이다.
내 기억 속에서는 '웬지'와 '왠지'를
미묘하게 다른 의미로 구분해서 쓴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는 틀린 지식이다.
'웬지'라는 우리말 단어는 없다.
오직 '왠지'만이 있을 뿐이다.

'왠지'란 '왜 그런지'의 준말이고,
'어쩐지'라는 말과 유사하게 쓰인다.

-나는 왠지 네가 좋아.

같은 경우가 "왠지"를 쓰는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싶다^^

반면 '어찌 된, 어쩐'이라는 의미의 관형어를 쓰고 싶을 때는
'웬'만을 단독으로 쓴다.
-갑자기 웬 비가 그렇게 많이 온담.
-웬 얼굴이 그렇게 길어요?
(이 두 예는 연세한국어사전에 있는 예를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두번째 예는 좀 어이없다 ㅋㅋ)

'웬'은 또 '어떤, 어느'라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
-웬 아이가 찾아와서는 선생님을 찾던 걸요.
라는 식으로.

'웬'은 관형사이기 때문에 보통명사나 의존명사와 결합한
몇몇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
'웬만큼, 웬일'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법 성분을 생각했을 때,
관형사인 '웬'이 용언의 종결 어미인 '-지'와 결합한
'웬지'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단어인데,
아무래도 습관적으로 잘못된 표현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냥 잘못된 것도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결국 같은 이유로 '왠일, 왠만큼' 등은 결코 성립될 수가 없다.
그 단어가 결합된 형태를 풀어써서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온전한 단어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웬일'이란 '어찌된 일, 무슨 일, 무슨 까닭'등의 뜻으로 쓰이는데
'왜'라는 부사가 개입될 이유가 전혀 없을 뿐더러
부사기 때문에 '일'이라는 명사와 결합할 근거가 약하기도 하다.
다른 두 개의 예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리하자면,
어쩐지, 정도의 의미로 쓰는 단어의 옳은 표현은 '왠지'이고
어떤,이나 어느, 어찌 등의 뜻을 가진 관형사는 '웬'이다.
'웬'은 관형사기 때문에 다른 명사들과 결합돼서 의미가 파생해
쓰이는 다른 명사형을 가지기도 한다.
'웬일, 웬만큼'이 그런 예라고 볼 수 있겠다.



Posted by papyrus

봄날은 간다

review/movie 2004. 1. 13. 02:54
이 영화의 영화평은 이미 올린 적이 있는데,
지난 토요일에 토요명화로 나오는 것을
무심히 앉아서 또 보곤
그냥 뭔가 다시 쓰고 싶어졌다.

영화는 여전히... 그렇게 흥미롭고 흡인력있게
강한 매혹을 가지고 다가오지는 않았다.
템포가 너무 느린 탓인가.
그런데도 몇 년전에 처음으로 본 이 영화와
엊그제 혼자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본 이 영화는
사뭇 다르긴 했다.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이 영화는 어딘가 묘한 데가 있다.
한순간은, 이 영화의 감정과 시공간이
일상의 선들을 너무나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지루하게 느껴지는가 싶다가도,
인물들간의 갈등 관계가 부각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공간의 모습들은,
언뜻 보기엔 누추해 보이는 곳조차,
너무 따뜻하고 아름답다.

전화를 걸고 싶지만, 걸 수 없는 망설임에
핸드폰을 들고 벨소리를 바꾸려는 것처럼
이 소리, 저 소리로 성급히 바꾸어 음악을 들어보는
상우(유지태)의 바쁜 손놀림은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한 느낌이다.
게다가 자신을 떠나간 여자를 뒤쫓아 가
다른 남자를 만난 그녀를 보고
콘도 주차장에 세워둔 그녀의 차를 키로 부욱 긁고 가는 모습이라니.
이건 좀 심하게 솔직하잖아 했다.

그런가 하면,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 옆에 가서
술잔을 받아 함께 기울이는 창문 속 부자의 모습이
마치 배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추녀 밑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풍경에 초점을 맞춘 채
그들의 모습을 찍은 장면 같은 것을 보거나,
오래된 벽지가 발라진, 낡은 상우의 방에
가만히, 그리고 조금은 멀찍이서, 시선을 던져주는 장면이나,
눈이 사그락거리고 내리는 산사에서
눈발 날리며 가벼운 바람에 살풋 흔들리는 눈과 풍경 소리를 담는
그런 장면들에서,
공간과 병치되는 이 낯선 감정의 흐름은 대체 무언가,싶다.
일상적이고 때로는 누추하기까지 한 공간들이
특별한 기교를 거치지 않고도
아름답고 투명하고 따뜻한 장면으로 바뀌는 그런 모습은
그 솔직한 감정의 선들을 따라가다가
순간순간 발길을 서두는 마음을 멈칫거리게 만든다.

그렇다고는 해도,
처음 봤을 땐 별로 공감할 수 없었던 상우의 감정에
이제는 어느 새 동화되어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너무나 냉정하게 그를 떠나보낸,
가던 버스에서 내려가며 굳이 헤어지자고 말한 은수(이영애)를
잊지 못해, 그녀의 아파트 밑에서
그녀가 서성대다 불을 끄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차 안에서 그대로 잠들어서는 아침에 나오던 그녀에게
그 모습을 들켜 버린 것,
그리고 기어이 그녀를 따라가서 차까지 긁어놓고 오던 장면들이
예전에는 그저, 쟤 뭐야, 스토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감정의 극단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어 버렸다.
일방적으로 끝내자고 하는 말 한 마디로
싹둑 베어지지 않는 그의 감정, 그의 느낌, 그의 아픔 같은 것에
공감할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이 영화는 여전히 내겐 좀 지루하다.
그냥 8월의 크리스마스,가 다시 보고 싶다.
Posted by papyrus